이 또한 죄송하게 되었습니다만, 제대로 번역을 안하고 의역을 한 부분이 많습니다. 그리고 많은 부분을 이상하게 옮기거나, 해석이 안되게 번역한 곳이 있으니, 부디 넓은 아량으로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나의 학창시절(원제-私の経過した学生時代)
나츠메 소세키(夏目漱石)
나의 학생 시절을 회고해 보면, 거의 공부라 할만한 공부는 하지 않고 보냈던 쪽이다. 따라서 이에 관하여 독자 여러분을 유익하게 할 참신한 공부법도 없거니와, 재미있는 재료도 갖고 있지 않지만, 자신의 교훈을 위해, 즉 이렇게 공부를 하지 않는 자는, 이러한 결과가 된다라는 교훈을 생각나는대로 적어보려고 한다.
나는 도쿄에서 태어나, 도쿄에서 자라났다. 이른바 순수 에돗코(江戸ッ子, 도쿄 토박이)이다. 확실히 기억하진 못하지만, 아무래도 11,2살 때 소학교의 문(8급제도 때)을 나와서, 그 후부터 지금의 도쿄 부립 제1중학교-그즈음 히토츠바시(一ツ橋)에 있었다-에 들어갔었는데, 언제나 노는 쪽이 주가 되어서, 공부라 할만한 공부는 하지 않았다. 더욱더 이 학교에 다녔던 것은 겨우 2,3년에 그쳤고, 느끼는 게 있어서 스스로 그만 둬 버렸는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이 중학교라는 것은, 지금의 완비된 중학교 따위하고는 전혀 달라서, 그 제도도 정칙(正則)과 변칙(変則)이라는 두 가지로 나눠져 있었던 것이다.
정칙이라는 것은 일본어만으로, 보통학의 대부분을 배우는 것인데, 그 대신 영어는 조금도 하지 않았다. 변칙 쪽은 이와는 달라서, 단지 영어만을 배울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어디에 있었냐면, 이 정칙 쪽에 있었으니까, 영어는 조금도 배우지 않았던 것이다. 영어를 배우고 있지 않았으니까, 당시의 예비문에 들어가는 게 힘들다. 이것으로는 안돼, 지금까지 자신이 품고 있었던, 지망을 이룰 수 없는 게 되니까, 반드시 망할거라는 생각을 했던 것인데, 좀처럼 부모님이 알아주시지 않았다. 거기서, 부득이한 사정으로 도시락을 싸서 집은 나오지만, 학교에는 가지 않고, 그대로 딴짓을 하면서 놀고 있었다. 그 와중에, 부모님께도 내가 학교를 그만다니고 싶다라는 생각이 이해되었던 것일까, 얼마 안있어서 정칙 쪽은 그만두게 되었던 것이다.
이미 중학교가 전에 말한 것처럼, 정칙, 변칙의 두 가지 과로 나누어져 있으며, 정칙 쪽을 배운 자에게는 전혀 어학력이 없으니까, 예비문의 시험에 응시할 수가 없다. 차등의 사람은,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은 어느 사숙 등에 들어가서 입학 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즈음, 내가 알고 있는 학원에는, 공립학사(共立学舎), 세이리츠 학사(成立学舎,1)등등 이라는 게 있었다. 이들 학원은 몹시 더러운 곳이었지만, 배우는 수학, 역사, 지리 등이라는 것은, 모두 원서를 쓰고 있었으니까, 아주 소양이 없는 자에게는, 비상히 뼈가 꺾이는 것이다. 나는 정칙쪽을 그만두고나서, 잠시, 약 1년만이라도 코지마치(麹町)의 니쇼학사(二松学舎, 2)를 다녔고, 한학만 전문으로 배웠는데, 영어의 필요-영어를 배우지 않으면 라는 필요가, 날이면 날마다 다가왔다. 그런 이유로 앞에서 언급한 세이리츠 학사에 들어가기로 했다.
이 세이리츠 학사라는 곳은, 스루가다이(駿河台)의 지금의 소가 스케노리(曾我祐準*)씨의 옆 집에 있던 학원으로, 교사(校舎)라는 곳은, 그것은 아주 불결한, 극히 살풍경한 곳이었다. 창에는 창문이 없으니까, 겨울은 찬바람이 쌩쌩 불어왔고, 교실에는 게다를 신은 채로 들어가는 모습이며, 교사 따위는 대부분 대학생이 학자금을 벌기 위해, 내직으로서 근무하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도, 당시 이 학사의 학생으로서 있던 사람으로, 지금 유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조금 예를 들어서 말해 보면, 전 나가사키 고등상업학교 교장을 하고 있었던 구마모토 아리타카(隈本有尚**), 고인(故人)인 히다카 마사자네(日高真実), 실업가 우에무라 슌페이(植村俊平***), 그리고나서 니토베(新渡戸****) 박사 등으로, 이 외에도 더 있을 것이다. 구마모토 씨는 그 때, 교사와 학생의 중간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또 니토베 박사는, 이미 삿포로 농학교(札幌農学校, 3)를 마치고, 대학 선과를 다니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어쨌든 나와 니토베 씨와는 옆 자리에 있어서, 그때부터 나는 그를 알고 있었지만, 그쪽에서는 모르는 것으로 보였는데, 바로 요즘의 일이다. 그와 만났을 때,
"나는 오늘 처음으로 당신과 만났소"라고 첫 인사를 건내니까, 나는 웃으며,
"아뇨, 저는 당신을 세이리츠 학사에 있을 적부터 잘 알고 있어요"라고 하니,
"아아 그랬군요"라고 하며 그쪽에서도 웃었던 것이다.
영어에 대해서는, 전에 내 형이 배우고 있어서, 거기에 대해서 조금만 배운 적도 있으나, 아무리해도 힘들어서 이해가 안되니까, 잠시만 하고 그만둬 버렸다. 그 후 조금도 영어란 것은 배우지 않고 있던 자가, 어쨌든 세이리츠 학사에 들어가자, 전에 말한 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서만을 쓰고 있던 모양이니까, 배우고 있지만, 원래 소양이 없는 머리에는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비상히 뼈를 깎는 것이지만, 규칙적인 공부도, 특수한 기억법도 한 것이 아니다.
또, 영어는 이러한 방법으로 해야 좋겠지라는 자각도 없이, 단지 빠르게, 하루라도 빠르게 어떤 책을 보고, 거기에 뭐가 써져 있을까 라는 것을 알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다. 그것으로 말하자면 무턱대로 읽어 본 쪽인데, 그 역시 일정 시기가 오지 않는다면, 얼마나 뭐라고 생각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이해할 도리가 없다. 또, 지금과 같이 비교적 서물이 완비되어 있던 게 아니니까, 많이 읽는다고 하더라도, 자연히 서물이 한정되어 있다. 우선 스스로 고생해서, 읽을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기르는 것 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뭐라도 무턱대고 읽었던 것인데, 그 읽은 것도 주로 어떤 것인가, 지금 잘 생각나지 않는다. 이리저리 하고있는 중에 예과 3학년부터 점점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또 수학에 대해서도 심히 고생해서, 수학 시간에는 칠판 앞에 끌려 나와서, 그대로 한시간 내내 서 있었던 적이 종종 있었다.
이것은, 대학 예비문(4)의 입학 시험에 응시했을 때의 일인데, 확실히 수학만은 옆사람이 보여줬던 걸까 , 아니면 살짝 봤던 것일까, 아무튼 그런 짓을 해서 시험은 겨우 마쳤는데, 이상한 점은 이 때의 일로, 나는 무사히 입학을 허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보면 준 분은, 불쌍하게도 불합격으로 끝나버렸다.
세이리츠 학사에서는, 약 1년 정도 다녔는데, 그 다음해 대학 예비문의 입학시험을 받고 보니, 전에 말한 것처럼 훌륭하게 급제했다. 딱 그게 17살 정도였다고 생각한다.조금 여기서, 이 즈음의 예비문에 대해서 얘기해 두지만, 처음 예비문의 년수가 4개년, 대학쪽이 4개년, 도합 대학을 나오기까지는 8년 간을 요하게 되어 있었지만, 내가 입학한 전후에는 그 규정은 바뀌어, 대학 3년, 예비문 5년이라고 하게 되었다. 결국 총체 년수로부터 말하자면 앞과 조금밖에 바뀌지 않았지만, 예비문만이라면, 1년 년수가 늘게 되었고, 그 예비문 5년을 또 2개로 나눠, 예과 3년, 본과 2년이라는 순서로 하였다.
그것으로, 예과 3년 수료자와, 그 즈음의 중학교 졸업생과 비교해 보면, 실제는 예과 쪽이 같은 보통학에서도 한참 진도가 나가 있던 것처럼 생각되었다. 즉 예과 쪽에서는 동물, 식물, 그 외의 과목이라도 대체로 원서로 공부하고 있었는데, 그 때의 예과 수료자는 중학교 졸업생과 같은 정도로 간주되게 되었다. 그래서 중학교 졸업생은, 영어 전수과라는 곳에 1년 들어가면, 바로 예비문 본과에 입학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규칙 개정 결과, 바로 이러한 결과가 된 것으로, 예과를 거쳐 가는 자보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들어간 자 쪽이 2년씩이나 이익을 얻게 된다.
나 따위는 중학교를 중도에 그만두고, 니쇼학사, 세이리츠 학사등에 다녔고, 그리고나서 예과에 들어간 것이니까, 심하게 옆길로 새버렸던 게 된다. 그런 것에선 오히려 그대로 중학교를 마치고 예비문에 들어간 쪽이, 년수 상에서 말해도 이익이었지만, 나뿐만이 아닌, 나와 같은 경로를 거쳐 진학한 사람이 많이 있었다. 그 사람들은 우선 손해본 쪽의 무리이다.
그런데, 나는 이 예비문에 있을 때도 거의 공부는 하지 않았다. 이 당시는 집에서 다니지 않고, 간다 사루가쿠쵸(神田猿楽町)의 어느 하숙집에, 지금의 남만철도(南満鉄道, 5)의 부총재를 하고 있는, 나카무라 제코(中村是公*****)라는 남자와 같이 하숙하고 있었는데, 아침은 학교 수업 시작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별 수 없이 일정 시간에는 기상했지만, 밤의 수면시간 따위는 천차만별로, 거의 일정하지 않았다.
역시, 이 때도 학과에 대해서 각별히 잘했다고 할만한 것은 없었다. 그 중에도 수학, 영어라고 하면 가장 힘든 쪽인데, 라고 하며 공부도 하지 않고 매일매일 자유로운 방침으로 놀며 지내고 있었다. 따라서 학교 서적은 점점 나쁘게 될 뿐으로, 예과 입학 당시는, 지금의 하가 야아치(芳賀矢一******) 씨 등과 같은 자리에서, 상당히 같이 있었지만, 내쪽은 공부를 안했기 때문에, 아래로 아래로 내려 갈 뿐이었다. 그 외, 당시의 동급생에는 지금 미술학교장을 하고 있는 마사키 나오히코(正木直彦), 전문학무국장을 하고 있는 후쿠하라 요지로(福原鐐二郎), 외국어학교의 미즈노 시게타로(水野繁太郎) 씨등이 있어서, 그 사람들은 아주 잘하는 축이었지만, 우리들 놀기 좋아하는 무리는 모두 성적이 좋지 않아서, 점점 이들과 자리가 멀어질 뿐이었다.
공부를 하지 않았으니까, 어느쪽이냐고 하면 운동은 비교적 좋아하는 쪽이었지만, 그 운동도 몸이 허약했기 때문에, 규정대로 운동을 노력해서 했던 것은 아니다. 단지 놀았다는 쪽에 불과하지만, 보트 레이스 정도는 좋아해서 했던 족이다. 앞에서 말한 나카무라 제코씨등은, 아주 운동을 잘하는 쪽이라서, 언제라도 보트에서는 챔피언이 되어있었지만, 나는 좋아서 했지만, 챔피언 따위에는 어찌해도 되지 못했다.
그 외의 운동이라고 해도, 당시는 아직 야구도 없고, 테니스도 없었으니까, 보통 체조정도라서, 병식 체조는 하지 않았다. 요컨데 운동이라기보단 제멋대로 놀고 지냈다는 쪽으로, 종종 봄방학등이 되면, 책상을 싸그리 치워버리고, 놀음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험기간이 되어서도 그런 걱정은 하지 않는다. "내 어찌 시험 점수 따위에 연연하랴"라는 생각으로, 전혀 공부란 공부는 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두뇌는 발달하지 않고, 성적은 점점 나빠질 뿐이었다. 도대체 나는 머리 나쁜 쪽에서-지금도 그러하지만-거기다가 공부를 하지 않는 쪽이었으니까, 학교에서의 신용도 점차 잃게 되어, 마침내 예과 2년 때에 낙제라는 운명에 처하기에 이르렀다.
낙제하고 보니 누구나 같이, 과연 좋은 기분은 들지 않는다. 그 후는 전과 다르게, 진지하게 공부도 하게 되었지만, 역시 사람이 보통의 일을 했던 것뿐으로, 특별히 엄격한 공부를 계속했던 것은 아니다.
교실에 들어가서도 전과 다르게, 단지 비상히 주의해서 교사가 말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고 할 정도의 것이었다. 진지하게 공부하고, 학교에 가서도 진지하게 교사가 말하는 것을 주의해서 듣기라도 하면, 그런 무턱대고 고생하지 않아도, 보통이라면 할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나는 설령 진지한 공부를 하게 된 뒤라도, 시험 한참 전부터 결코 고생 같은 것은 하지 않고, 시험 그 전날 밤이 되어서, 처음으로 공부해두자라는 방법을 취하고 있던 정도이다.딱 예과 3년, 19세 즈음의 일인데, 우리 집은 원래부터 풍족한 편은 아니어서, 한번 집에서 학자금을 받지 말고 해보자라는 생각에서, 월 5엔의 급여로 나카무라 제코씨와 같이 사숙 교사를 하면서 예과 쪽에 다녔던 적이 있다.
이게 나의 첫 교사 경험으로, 그 사숙은 에토의숙(江東義塾)이라고 하고 혼죠(本所)에 있었다. 어느 유지들이 협동하여 세운 것인데, 교사는 역시 지금 생각해봐도 아주 불결한 부류였다.
1개월 5엔이라고 하면 아주 적은 금액이지만, 그때는 그것으로 부족없이 살았다. 학원 기숙사에 들어가 있었으니까, 기숙사비 즉 식비로는 월2엔으로 끝내고, 예비문의 수업료라면 월 겨우 25전(더욱이 1학기 분 전납하게는 되어있었는데) 거기에 서물(書物)은 대체로 학교에서 빌렸으니까, 각별히 그 쪽에는 돈도 들지 않았다. 우선 이 중에서 목욕비를 조금 빼면, 잔돈은 대체로 용돈이 되어서, 5엔의 돈을 받으면, 바로 그 잔돈만을 나카무라 제코씨의 몫과 합쳐 둬서, 같이 나갈 때는 많이 먹는 쪽에서 써버렸던 것이다.
시간도, 에토 의숙 쪽은 오후 2시간만 일했으니까, 예비문에서 돌아와서 가르치게 되었다. 그러니까, 밤 따위는 물론 차분히, 자유롭게 자신의 공부를 하는 것도 가능해서,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고, 약 1년씩이나 이렇게 하고 있었는데, 이 토지는 비상히 습기가 많았기 때문에, 마침내 급성 트라코마(trachoma, 독일어-trachom-원문에는 독일어인 트라홈이라고 적혀 있다)를 앓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내 눈은 좋지 않다. 부모님은 그 트라코마를 엄청 걱정해서 "어쨌든, 그런 곳이라면 무리해서 근무하고 있을 필요도 없겠지.'라고 해서, 학원 쪽은 그만두고, 예비문에는 집에서 다니기로 했는데, 얼마 안가 그 에토 의숙은 없어져 버렸던 것이다.
그 후, 나중의 학비는 말할것도 없이, 다시 집에서 받았지만, 대학교에 진학하게 되고나서는, 특히 문부성에서 자금을 받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또 도쿄 전문학교의 강사를 맡아서, 그정도로, 고생도 않고 대학교를 마친 사정으로, 요컨데 어떤 도움을 주는 것도 없어, 나는 학생시절을 회고하며, 오히려 독자 여러분 때문에 교훈이 되지 말 것을 바라는 것이다.
*주(인물)
*.소가 스케노리(曾我祐準, 1844년~1935년)-일본의 군인이자, 정치가.
**.구마모토 아리타카(隈本有尚, 1860년~1943년)-일본의 교육자이자 정치가.
***.우에무라 슌페이(植村俊平, 1863년~1941년)-일본의 정치가, 오사카 시장을 지냈음.
****.니토베 이나조(新渡戸稲造, 1863년~1933년)-일본의 농학자, 교육자. 국제연맹사무차장. "무사도"라는 저작이 유명하다.
*****.나카무라 요시코토, 혹은 제코(中村是公, 1867년~1927년)일본의 관료, 실업가, 정치가. 나중에 남만주철도회사(만철)의 이사로 있을 때, 만주로 소세키를 초대했는데, 소세키는 이 만주 여행의 경험을 "만한 여기저기(満韓ところどころ)"라는 제목의 글로 발표했다.
******.하가 야이치(芳賀矢一,1867년~1927년)-일본의 국문학자.
*주(단체)
1.세이리츠 학사(成立学舎)-메이지 시대 초기에서 중기에 도쿄에 있던 교육기관.
2.니쇼학사(二松学舎)-1877년에 미시마 츄슈(三島中洲)가 세운 한학숙(漢學塾). 지금의 니쇼학사대학
3.삿포로 농학교(札幌農学校)-메이지 초기에 홋카이도에 세웠던 농업학교. 지금의 홋카이도 대학(北海道大学).
4.대학 예비문-지금의 대학교 1,2학년 과정?
5.남만주철도주식회사(南満州鉄道株式会社)-태평양 전쟁 이전까지 만주지역에 있었던 철도 사업을 중심으로 한 기업. 패전 이후 해체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