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한 이시와라 칸지 2

(전략)
검열 마지막 날에는 사단장 통제하에 제병연합연습이 오죠지(王城寺)에서 실시되었다.
이 훈련에 참가한 이시와라 연대는 밤을 새서 공격준비를 갖추고 다음 날 새벽에 공격을 실시했다.
적전 수백미터 선에 도착했을 때, 사단 참모가 큰 목소리로 이시와라 연대장에게,

"상황을 전하겠습니다. 저기 있는 고지를 점령하고있는 적의 기관총 사격이 맹렬해서 연대의 진격은 극히 곤란합니다."

이시와라는 참모한테,

"나한테는 아무 것도 기관총 같은 거 따위 안보이는데...?"

저자 주: 이런 경우에는 '전황 표시'로서 기관총을 쓰지 않을 때는 깃발로 표시하게 되어 있다. 이런 중요한 전황을 단순히 구두 전달하는 것은 연습 지도상 문제이다.

참모는 이에 대해 약간 당혹했지만,

"어쨌든 상황은 상황입니다."

이시와라는 " 좋아, 알겠어!"라고 대꾸하고는 큰 목소리로 전 연대 장병들한테,

"연대 전멸!! 연대장도 전사, 모두 누워서 자라(皆寝ろ)!!"

라고 명령하고 연대장도 앞장서서 대지에 누워서 전 연대를 쉬게 하였다.

横山臣平『秘録 石原莞爾』(芙蓉書房, 1971년)

by 재팔 | 2012/01/23 07:43 | 아시아 태평양전쟁 | 트랙백 | 덧글(4)

전후의 무타구치를 만난 사람의 이야기

http://www.geocities.co.jp/WallStreet/2687/jinjiotu/jinji16.html

사이트 자체는 우익이지만 재밌는 자료가 많습니다.
요악하자면,

1. 찬드라 보스의 추도 모임에 대단한 사람들이 와 있다고 하는 오오시마 히로시(1)의 말을 듣고 온 저자 사가라 슌스케(相良俊輔).
2.카와베 마사카즈(2)와 타나카 신이치(3) 등의 당시 버마 전선 관련자들과 만났는데 그 중에 문제의인물 무타구치 렌야를 만남.
3. 무타구치에게서 초대의 엽서를 받음.
4.무타구치는 그에게 전사 자료와 유족들에게서 받은 원한이 담긴 엽서를 보여줌.
5. 무타구치는 사망하기 한달 전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함.
"설령 바커(4) 중령의 증언으로 임팔 작전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수만의 부하를 죽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결코 지울 수 없습니다. 역시 제 마음은 살아있는 한, 떳떳할 수 없습니다."

1. 大島浩. 육군 중장이자 대전 때의 주독 일본 대사. 철저한 친독파에 삼국동맹을 지지. 히틀러의 친구.

2.河辺正三. 임팔 작전에서의 무타구치 상관. 삼국지의 유장과 같은 포지션. 단 유장과 달리 피해입는 사람이...

3.田中新一. 개전 당시 참모본부 작전부장. 임팔작전 때는 제18사단장으로 근무. 나중에 버마 방면군참모장으로 근무. 이때 사령관과 작전을 놓고 대립했는데, 질린(?) 사령관은 사상 초유로 전선에 남은 장병들을 내버리고 타이로 도망쳤다. 그의 이름은 키무라 헤이타로(木村兵太郎).
개전 당시 개전파로 육군성의 무토 아키라(武藤章)와 대립(무토는 개전 반대)했는데 무토는 전후 전범으로 처형, 그는 70년대까지 살았다.

4. A J. Baker. 영국 육군 중령. 승리와 패배로 우리나라에 번역된 시리즈에 이 사람의 저서가 다수 있다. 진주만, 가미카제, 야마시타 편의 저자.
이 사람이 전후에 무타구치에게 왜 디마푸르를 공략하지 읺았는가? 그 곳은 영국의 보급거점이라 타격이 상당했을 것이다. 라는 편지를 보냈다.

by 재팔 | 2012/01/06 15:24 | 아시아 태평양전쟁 | 트랙백 | 덧글(17)

토죠 자살 미수사건의 일화

종전 후, 미군이 토죠 히데키 전 총리대신을 체포하러 오자, 토죠는 방 안에서 권총으로 자살을 시도하나 급소를 빗나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때, 조사하러 입회한 헌병이 일본인 기자에게 물었습니다.

헌병-이 사람은 누구요?

기자- 토죠 히데키요.

헌병-호오. 그럼 이 사람의 직업은 뭐요?

기자-육군대장.

헌병-육군대장? 그럼 현역인 건가?

그러자 기자가 대답했습니다.

기자-거 참 귀찮게 만드는군. 그냥 전직 독재자라고 하쇼!

믿거나 말거나 ㅋㅋ

출처-대동아전쟁비사 도쿄재판편. 고지마 노보루의 글을 가공했습니다.

헌병-

by 재팔 | 2011/11/14 23:45 | 아시아 태평양전쟁 | 트랙백 | 덧글(2)

남경사건-카사하라 토쿠시

제목-남경사건(南京事件)
저자-카사하라 토쿠시(笠原十九四, 왜 자꾸 쥬큐시라고 읽게 되는지-_-;;)
출판사-우리의 친구(?) 이와나미 쇼텐

1. 남경 학살에 관한 일본측 연구자 중 한 명인 카사하라 토쿠시 교수의 책입니다. 가끔 실수를 저질렀다는 지적이 있긴 하지만, 호라 토미오(洞富雄) 교수 이후로 이렇게 이 분야에 깊이 매달리는 분은
많지 않은 듯 합니다(물론 하타 이쿠히코, 요시다 유타카 교수 등은 제외-_-;;).

2. 시작은 역사상 첫 원거리 도양 폭격이 된 남경 및 남창 등지에 가해진 일본 해군의 폭격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압박은 무려 호위기도 없이(-_-;; 겐다 미노루의 전투기는 필요 없다! 주의에 따라) 출격했다는 부분.
그리고 일본 해군의 항공 주병론자들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사실 이 부분은 카사하라 교수가 계속 언급하는 중일전쟁과 해군이라는 테마입니다. 즉 항공파들은 자기들이 주장하는 항공의 우수성을 입증하려고 이 전쟁을 바랬다는 거죠(야마모토 이소로쿠도 언급되고 오오니시 타키지로도 남경 폭격에 대해 자랑하는 모습이 인용됩니다). 그리고 육군 불확대파의 입을 사실상 막아버린 게 노구교 사건 이후에 장개석군의 북상과 해군의 제2차 상해사변이었죠.
그리고 남경전에서도 구축함(혹은 소형 함정)으로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패잔병 사냥(!)에 일조합니다.

3. 아이리스 장은 그녀의 한계성으로 인해서 언급을 안 했지만 카사하라씨는 육군 내부의 전쟁의 확대를 둘러싼 다툼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지요.
거기다가 아이리스 장이 불쌍하다는 식으로 묘사한 마츠이 이와네(松井石根)에 대해서는 그의 일기 및 행적을 조사해서 남경 대학살의 일차적인 원인을 그에게 찾고 있습니다.
1)예비역 대장에서 막 복귀하여 공명심에 급급.
2)대아시아주의자로 남경 정부 전복을 시도.
3)1,2에 덧붙여서 그의 무단 전선 확대는 보급 및
질서 유지에 대해 필요한 헌병의 부족으로 이어져서 군기 문란을 단속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공명심으로 시작된 남경 진격 때문에 장병의 피로와 피해는 극심해졌고(남경 진격 때문에 화북에 있던 제16사단은 무려 남경까지 강행군합니다-_-;;) 이로 인해 풍토가 조성되었다.
이외에도 패잔병 사냥과 강간이라는 이 사건의 주요 테마도 다루고 있지만 이건 여러 책에서도 다루고 있으니(패잔병 학살이라는 테마는 호라 토미오씨도 잘 다룹니다)... 위의 두 점이 여타 다른 책과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겠죠.

4. 점점 아이리스 장의 책은 별로라는 생각이 듭니다.-_-;;

by 재팔 | 2011/11/13 07:06 | 아시아 태평양전쟁 | 트랙백 | 덧글(1)

우츠노미야의 유언

다이쇼 11년, 우츠노미야는 병으로 몸져눕게 되어재기불능을 깨닫자, 수도에 있는 동지들을 불러모았다. 다다미 12조의 병실의 벽에는 커다란 세계 지도가 걸려 있었다. 거기에 있던 아라키 사다오 대좌에게,

"이봐 아라키"

하고 불렀다. 병 든 탓에 목소리엔 힘이 없다.

"빨간 연필로 동경 60도와 170도선에 줄을 긋게."

아라키는 공손히 명을 받들었다. 그걸 즐겁게 바라보면서,

"그 정도의 땅을 일본의 영토로 만드는 거야. 알겠나? 모두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내 유언은 그것뿐이야. 끝!"

병실에 있던 일동은 모두 말이 없었고 기침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우츠노미야는 눈을 감고 그 뒤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라키가 그은 붉은 선을 따라가보자. 서쪽은 대체로 우랄산맥을 경계로서 중앙아시아를 관통해,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과 이란 국경을 통해서, 아라비아해로 나오고, 동은 북쪽에서는 베링 해협에서 시작해서 남쪽은 뉴질랜드 동쪽을 통하는 일부변경선이다. 이 안에 포함된 곳은 시베리아 전부, 중국, 인도, 동남아시아부터 호주, 뉴질랜드이다. 이 정도를 일본의 영토로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을 사가 좌견당(左肩党) 무리는 짊어지게 된 것이다.
高宮太平「軍国太平記」中央公論。2010

군벌 서적 중 한권만 군국태평기에 나온 우츠노미야 타로(宇都宮太郎) 유언 내용입니다. 해당 인물은 대아시아주의자로 이것 저것 관심을 많이 가졌습니다. 김석원 장군 회고록에는, 일개 중위인 자신에게 잘해주고 박영효를 소개해줬으나, 본질은 제국주의자이다라고 기록합니다.
이 내용은 실제로 다르다고 합니다. 저 사가 세력의 한명은 츠치하시 유이츠(土橋勇逸)의 회고는 이게 아니라고 합니다.

by 재팔 | 2011/10/30 07:32 | 잡담 | 트랙백 | 덧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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