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 오가이의 유언 중에 인상 깊은 부분

余ハ石見人森林太郎トシテ死セント欲ス
나는 이와미 사람(石見人) 모리 린타로(森林太郎)로서 죽고 싶다.

도쿄대 최연소 졸업하고 독일에까지 유학간 엘리트에다가, 육군 군의 총감(군의 중장?)까지 올라가고, 제실 박물관장 등을 역임한 출세자가 남긴 유언에 있는 말입니다.
최근에 읽는 '森鴎外-明治人の生き方'라는 책에서는 어느 학자가 당시 불운(?)했던 말년(무려 박물관이 털리는!)이라서 했을 말이라고 하는 설을 소개했는데, 과연 모리 오가이의 생각은 어떠했을지 궁금합니다.

ps-다이쇼 문학사라는 책을 읽었었는데, 모리 오가이... 정치적으로도 뭔가 대단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무려 야마가타 아리토모에게 정치적으로 뭔가를 건의하려고 했다가 야마가타의 사망으로 실패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by 재팔 | 2009/11/01 00:48 | 트랙백 | 덧글(2)

코다 로한


코다 로한(幸田 露伴, こうだ ろはん, 1867년 8월 22일 ~ 1947년 7월 30일)은, 일본의 소설가이다. 본명은 시게유키(成行)였다. 별호로는 카규안(蝸牛庵), 사세노츠유(笹のつゆ), 설음동주(雪音洞主), 탈천자(脱天子) 등 다수가있다. 에도 시타야(江戸下谷) 출신이다. 딸인 후미(文)도 수필가이자 소설가였다. 제국 학사원(帝国学士院)과 제국 예술원(帝国芸術院)의 회원이었다. 제1회 문화훈장(文化勲章)를 받았다.
『風流仏』로 평가받고, 『오층탑(五重塔)』『운명(運命)』등의 작품으로 문단에서의 지위를 확립했다. 오자키 코요(尾崎紅葉)과 함꼐 코로지다이(紅露時代)라고 불리는 시대를 쌓았다. 의고전주의(擬古典主義)의 대표적인 작가로, 또한 한문학과 일본 문학이나 각 종교에도 능통하여, 많은 수필이나 사전(史伝)외, 『바쇼 칠부 평석(芭蕉七部評釋)』등의 고전연구 등을 남겼다.

생애

1867년 7월 23일, 에도 시타야 三枚橋横町(현재의 도쿄도 타이토구 東京都台東区)에 넷째 아들로서 태어난다. 아버지는 바쿠후의 신하(幕臣) 코다 토시미츠(幸田利三,시게노부?成延)로, 어머니는 유우(猷). 코다 가문은 에도 시대, 다이묘의 取次(1)를 맡았다. 어릴적 이름은 테츠시로(鉄四郎)엿다. 원래 병약하였고, 생후 27일째에 의사의 신세를 지는 등, 어릴적은 몇번이나 생사의 고비를 헤맨 적이 있었다. 다음해, 우에노 전쟁(上野戦争)가 일어났기 떄문에, 아사쿠사 스와쵸(浅草諏訪町)로 이사를 간다.

시타야로 돌아온 후, 칸다(神田)에 정착했다. 시타야 센바시토오리의 세키 치요(関千代 서가 세키 셋코関雪江의 누나)의 학사(원문에는 塾)에서 배웠고, 御徒士町의 아이다씨(相田氏)의 학사에서 素読을 배웠다. 1875년, 치요의 권유로 도쿄 사범학교 부속 소학교(나중에 도쿄 교육대학 부속 소학교, 지금의 치쿠바대학 부속 소학교)에 입학했다. 이때부터 草双草, 독본을 애독하게 되었다.

졸업 후인 1878년, 도쿄부 제1중학 정칙과에 입학한다. 오자키 코요(尾崎紅葉)나 우에다 카즈토시(上田萬年), 카노 코키치(狩野亨吉)들과 동급생이었다. 나중에 집안 사정으로 중퇴했고, 14세가 되었을 때, 도쿄 영학교(현재의 아오야마 가쿠인대학)에 진학하지만, 이곳도 중도 퇴학했다. 도쿄부 도서관에 다니게 되어, 아와시마 칸게츠를 알았다. 또한 형 시게츠네의 영향으로 하이카이에 능숙해졌고, 또 菊地松軒의 영의숙에서는 한학, 한시를 배웠다.

16세 떄, 급비생으로서 체신성 전신 수기학교에 들어갔고 졸업 후에는 관직인 전신 기사로서 홋카이도 요이치(余市)에 부임했다. 츠보우치 쇼오(坪内逍遥)의 『소설 신수(小説神髄)』나 『당세 서생 기질(当世書生気質)』과 만나게 된 로한은, 문학의 길을 지향할 정열이 싹텄다고 한다. 그러나 1887년 자리를 버리고 귀경(歸京)했다. 이 홋카이도에서 도쿄까지 가는 여정이 "突貫紀行"의 제재(題材)이다.
면관 처분을 받았기 때문에 아버지가 시작한 지물포 '愛々堂'에서 일했고, 한편으로 이하라 사이가쿠(井原西鶴)의 책을 즐겨 읽었다. 1889년, 홋카이도의 부임지에서 돌아온 로한은 '露団々'을 기초해, 칸게츠를 통하여 '도읍의 꽃(都の花)'에 발표했다. 이것이 야마다 비묘의 격찬을 받고, 더 나아가 '風流佛(1889년)', 야나카 텐노지(谷中天王寺)를 배경으로 한 '오층탑(1893년)'등을 발표하여,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한다.
1894년, 장티푸스에 걸려 죽을 뻔 했으나, 다음 해에 결혼, 그 이후 수년 동안 '수염 기른 남자(ひげ男, 1896년)', '新羽衣物語(1897년)', '椀久物語(1899~1900년)'을 발표, 또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도시론(都市論)인 '한 나라의 수도(一国の首都, 1899년), '물의 도쿄(水の東京, 1902년)도 발표한다.

이 즈음에 동 세대의 오자키 코요와 함께 '코로 시대'라고 불리는 황금시대를 맞이한다. '사실주의의 오자키 코요, 이상주의의 코다 로한'으로 나란히 불리워 메이지 문학의 한 시대를 만든 로한은, 근대 문학의 발전을 방향지었다. 또 오자키 코요, 츠보우치 쇼요, 모리 오가이(森鴎外)와 함께, '코로쇼오 시대(紅露逍鴎時代)'라고 불린 적도 있다.
1904년, 그때까지 몇번이나 중간에 그만뒀었던 '天うつ浪'의 집필을 완전히 중단했다(추후에 다시 번역). 이 이후, 주로 사전 집필이나 고전 평역에 주안을 두었다. 사전 작품으로서는 '요리토모(頼朝)_', '타이라노 마사카도(平将門)', '카모 우지사토(蒲生氏郷)'등이 있다. 한편, 이하라 사이가쿠나 '난소사토미 핫켄덴'을 평역했고, 沼波瓊音, 太田水穂들 바쇼 연구회의 6명과 같이 쓴 '바쇼 하이쿠 연구(芭蕉俳句研究)'를 출간했다. 1920년에는 '마츠오 바쇼 칠부작(松尾芭蕉七部作)'의 주석을 시작해, 17년이나 걸려서 만년인 1947년에 평역을 완성시켰다.

1907년, 당의 전기소설(伝奇小説) 유선굴(遊仙窟)이 만요슈(万葉集)에 깊은 영향을 준 것을 논한 '유선굴'을 발표했다. 1908년에는 교토 제국대학 문과대학 초대 학장인 옛 친구 카노 코키치에게 권유받아서, 국문학 강좌를 맡은 강사가 되었다. 같은 시기에 나이토 코난(內藤湖南)도 동양사 강좌를 맡은 강사로 초빙받았다. 두 명은 각자 소설가로서, 저널리스트로서 당시부터 유명했지만 학자로서의 역량은 미지수였으며, 카노의 초빙은 파천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로한의 지도를 받은 青木正児의 이야기에 의하면, 일본 문파론(日本文脈論, 일본 문체의 발달사)와 소가 모노가타리(曽我物語)와 일본식 범찬에 대한 문학론과 치카마츠 몬자에몬등의 강의 내용으로, 결코 좋은 말솜씨는 아니었지만 학생들의 평가는 엄청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칠판에 쓴 글씨는 초서체로 갈겨 썼고, 게다가 체격이 다부지고 머리가 커서 그 글을 덮어버려서 학생들은 노트 필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로한은 학자로서도 충분한 소양이 있었지만, 어떤 사정에 의해 하계휴가로 도쿄로 돌아온 채로, 겨우 1년도 되지 않아(교토로 이사했던 것은 당해년 초였다)로 대학을 그만둬 버렸다. 로한 자신은 농담처럼 교토는 산만 있어서 낚시를 할 수 없으니까,라고 말했지만, 관료적이고 갑갑한 대학교에 적응할 수 없었던 듯하다. 또한, 부인 키미코(幾美子)가 병이 든 것도 이유로 생각된다(키미코는 다음해 1910년에 사망했다). 얄궂게도 대학을 그만둔 다음 해인 1911년에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받는다.

잠시 작품을 발표하지 않은 시기 후, '유정기(幽情記, 1915년~17년의 작품을 정리한 단편집), '운명(運命, 1913년)을 발표하여 대 호평을 얻고 문단에 부활한다. 이 작품들은 중국 고전을 답습한 작품이며, 이 이후에도 중국에서 소재를 얻은 작품을 많이 발표하였다.

1936년 4월 28일에는 제1회 문화훈장을 수여받고 제국 예술원 회원이 된다. 1947년 7월 30일, 전후에 이사가서 살고 있던 치바현 이치카와시(千葉県市川市)에서 81세로 사망했다. 묘는 이케노우에 혼몬지. 계명은 露伴居士이다.

by 재팔 | 2009/10/10 07:33 | 트랙백 | 덧글(0)

의외로 번역된 책

패배를 껴안고

요새 출판시장에 이런 책이 번역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원서가 90년대 후반에 나왔고, 중판이 2000년대 들어와서 출간된 것에 비해서는 상당히 늦었습니다만, 앞으로 이런 책이 많이 번역되길 빕니다(하지만 역시 시장성이;;).

by 재팔 | 2009/09/20 14:06 | 잡담 | 트랙백 | 덧글(0)

나츠메 소세키의 학창시절

이 또한 죄송하게 되었습니다만, 제대로 번역을 안하고 의역을 한 부분이 많습니다. 그리고 많은 부분을 이상하게 옮기거나, 해석이 안되게 번역한 곳이 있으니, 부디 넓은 아량으로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나의 학창시절(원제-私の過した生時代)

나츠메 소세키(夏目漱石)

 

나의 학생 시절을 회고해 보면, 거의 공부라 할만한 공부는 하지 않고 보냈던 쪽이다. 따라서 이에 관하여 독자 여러분을 유익하게 할 참신한 공부법도 없거니와, 재미있는 재료도 갖고 있지 않지만, 자신의 교훈을 위해, 즉 이렇게 공부를 하지 않는 자는, 이러한 결과가 된다라는 교훈을 생각나는대로 적어보려고 한다.

 

나는 도쿄에서 태어나, 도쿄에서 자라났다. 이른바 순수 에돗코(江戸ッ子, 도쿄 토박이)이다. 확실히 기억하진 못하지만, 아무래도 11,2살 때 소학교의 문(8급제도 때)을 나와서, 그 후부터 지금의 도쿄 부립 제1중학교-그즈음 히토츠바시(一ツ橋)에 있었다-에 들어갔었는데, 언제나 노는 쪽이 주가 되어서, 공부라 할만한 공부는 하지 않았다. 더욱더 이 학교에 다녔던 것은 겨우 2,3년에 그쳤고, 느끼는 게 있어서 스스로 그만 둬 버렸는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이 중학교라는 것은, 지금의 완비된 중학교 따위하고는 전혀 달라서, 그 제도도 정칙(正則)과 변칙(則)이라는 두 가지로 나눠져 있었던 것이다.

 

 정칙이라는 것은 일본어만으로, 보통학의 대부분을 배우는 것인데, 그 대신 영어는 조금도 하지 않았다. 변칙 쪽은 이와는 달라서, 단지 영어만을 배울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어디에 있었냐면, 이 정칙 쪽에 있었으니까, 영어는 조금도 배우지 않았던 것이다. 영어를 배우고 있지 않았으니까, 당시의 예비문에 들어가는 게 힘들다. 이것으로는 안돼, 지금까지 자신이 품고 있었던, 지망을 이룰 수 없는 게 되니까, 반드시 망할거라는 생각을 했던 것인데, 좀처럼 부모님이 알아주시지 않았다. 거기서, 부득이한 사정으로 도시락을 싸서 집은 나오지만, 학교에는 가지 않고, 그대로 딴짓을 하면서 놀고 있었다. 그 와중에, 부모님께도 내가 학교를 그만다니고 싶다라는 생각이 이해되었던 것일까, 얼마 안있어서 정칙 쪽은 그만두게 되었던 것이다.

 

이미 중학교가 전에 말한 것처럼, 정칙, 변칙의 두 가지 과로 나누어져 있으며, 정칙 쪽을 배운 자에게는 전혀 어학력이 없으니까, 예비문의 시험에 응시할 수가 없다. 차등의 사람은,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은 어느 사숙 등에 들어가서 입학 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즈음, 내가 알고 있는 학원에는, 공립학사(共立学舎), 세이리츠 학사(成立学舎,1)등등 이라는 게 있었다. 이들 학원은 몹시 더러운 곳이었지만, 배우는 수학, 역사, 지리 등이라는 것은, 모두 원서를 쓰고 있었으니까, 아주 소양이 없는 자에게는, 비상히 뼈가 꺾이는 것이다. 나는 정칙쪽을 그만두고나서, 잠시, 약 1년만이라도 코지마치(麹町)의 니쇼학사(二松学舎, 2)를 다녔고, 한학만 전문으로 배웠는데, 영어의 필요-영어를 배우지 않으면 라는 필요가, 날이면 날마다 다가왔다. 그런 이유로 앞에서 언급한 세이리츠 학사에 들어가기로 했다.

 

이 세이리츠 학사라는 곳은, 스루가다이(駿河台)의 지금의 소가 스케노리(曾我祐準*)씨의 옆 집에 있던 학원으로, 교사(校)라는 곳은, 그것은 아주 불결한, 극히 살풍경한 곳이었다. 창에는 창문이 없으니까, 겨울은 찬바람이 쌩쌩 불어왔고, 교실에는 게다를 신은 채로 들어가는 모습이며, 교사 따위는 대부분 대학생이 학자금을 벌기 위해, 내직으로서 근무하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도, 당시 이 학사의 학생으로서 있던 사람으로, 지금 유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조금 예를 들어서 말해 보면, 전 나가사키 고등상업학교 교장을 하고 있었던 구마모토 아리타카(隈本有尚**), 고인(故人)인 히다카 마사자네(日高真実), 실업가 우에무라 슌페이(植村俊平***), 그리고나서 니토베(新渡戸****) 박사 등으로, 이 외에도 더 있을 것이다. 구마모토 씨는 그 때, 교사와 학생의 중간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또 니토베 박사는, 이미 삿포로 농학교(札幌農校, 3)를 마치고, 대학 선과를 다니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어쨌든 나와 니토베 씨와는 옆 자리에 있어서, 그때부터 나는 그를 알고 있었지만, 그쪽에서는 모르는 것으로 보였는데, 바로 요즘의 일이다. 그와 만났을 때,

 

"나는 오늘 처음으로 당신과 만났소"라고 첫 인사를 건내니까, 나는 웃으며,

"아뇨, 저는 당신을 세이리츠 학사에 있을 적부터 잘 알고 있어요"라고 하니,

 "아아 그랬군요"라고 하며 그쪽에서도 웃었던 것이다.

 

영어에 대해서는, 전에 내 형이 배우고 있어서, 거기에 대해서 조금만 배운 적도 있으나, 아무리해도 힘들어서 이해가 안되니까, 잠시만 하고 그만둬 버렸다. 그 후 조금도 영어란 것은 배우지 않고 있던 자가, 어쨌든 세이리츠 학사에 들어가자, 전에 말한 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서만을 쓰고 있던 모양이니까, 배우고 있지만, 원래 소양이 없는 머리에는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비상히 뼈를 깎는 것이지만, 규칙적인 공부도, 특수한 기억법도 한 것이 아니다.

 

또, 영어는 이러한 방법으로 해야 좋겠지라는 자각도 없이, 단지 빠르게, 하루라도 빠르게 어떤 책을 보고, 거기에 뭐가 써져 있을까 라는 것을 알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다. 그것으로 말하자면 무턱대로 읽어 본 쪽인데, 그 역시 일정 시기가 오지 않는다면, 얼마나 뭐라고 생각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이해할 도리가 없다. 또, 지금과 같이 비교적 서물이 완비되어 있던 게 아니니까, 많이 읽는다고 하더라도, 자연히 서물이 한정되어 있다. 우선 스스로 고생해서, 읽을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기르는 것 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뭐라도 무턱대고 읽었던 것인데, 그 읽은 것도 주로 어떤 것인가, 지금 잘 생각나지 않는다. 이리저리 하고있는 중에 예과 3학년부터 점점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또 수학에 대해서도 심히 고생해서, 수학 시간에는 칠판 앞에 끌려 나와서, 그대로 한시간 내내 서 있었던 적이 종종 있었다.

 

이것은, 대학 예비문(4)의 입학 시험에 응시했을 때의 일인데, 확실히 수학만은 옆사람이 보여줬던 걸까 , 아니면 살짝 봤던 것일까, 아무튼 그런 짓을 해서 시험은 겨우 마쳤는데, 이상한 점은 이 때의 일로, 나는 무사히 입학을 허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보면 준 분은, 불쌍하게도 불합격으로 끝나버렸다.

 

세이리츠 학사에서는, 약 1년 정도 다녔는데, 그 다음해 대학 예비문의 입학시험을 받고 보니, 전에 말한 것처럼 훌륭하게 급제했다. 딱 그게 17살 정도였다고 생각한다.조금 여기서, 이 즈음의 예비문에 대해서 얘기해 두지만, 처음 예비문의 년수가 4개년, 대학쪽이 4개년, 도합 대학을 나오기까지는 8년 간을 요하게 되어 있었지만, 내가 입학한 전후에는 그 규정은 바뀌어, 대학 3년, 예비문 5년이라고 하게 되었다. 결국 총체 년수로부터 말하자면 앞과 조금밖에 바뀌지 않았지만, 예비문만이라면, 1년 년수가 늘게 되었고, 그 예비문 5년을 또 2개로 나눠, 예과 3년, 본과 2년이라는 순서로 하였다.

 

그것으로, 예과 3년 수료자와, 그 즈음의 중학교 졸업생과 비교해 보면, 실제는 예과 쪽이 같은 보통학에서도 한참 진도가 나가 있던 것처럼 생각되었다. 즉 예과 쪽에서는 동물, 식물, 그 외의 과목이라도 대체로 원서로 공부하고 있었는데, 그 때의 예과 수료자는 중학교 졸업생과 같은 정도로 간주되게 되었다. 그래서 중학교 졸업생은, 영어 전수과라는 곳에 1년 들어가면, 바로 예비문 본과에 입학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규칙 개정 결과, 바로 이러한 결과가 된 것으로, 예과를 거쳐 가는 자보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들어간 자 쪽이 2년씩이나 이익을 얻게 된다.

 

 나 따위는 중학교를 중도에 그만두고, 니쇼학사, 세이리츠 학사등에 다녔고, 그리고나서 예과에 들어간 것이니까, 심하게 옆길로 새버렸던 게 된다. 그런 것에선 오히려 그대로 중학교를 마치고 예비문에 들어간 쪽이, 년수 상에서 말해도 이익이었지만, 나뿐만이 아닌, 나와 같은 경로를 거쳐 진학한 사람이 많이 있었다. 그 사람들은 우선 손해본 쪽의 무리이다.

 

그런데, 나는 이 예비문에 있을 때도 거의 공부는 하지 않았다. 이 당시는 집에서 다니지 않고, 간다 사루가쿠쵸(神田猿楽町)의 어느 하숙집에, 지금의 남만철도(南満鉄道, 5)의 부총재를 하고 있는, 나카무라 제코(中村是公*****)라는 남자와 같이 하숙하고 있었는데, 아침은 학교 수업 시작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별 수 없이 일정 시간에는 기상했지만, 밤의 수면시간 따위는 천차만별로, 거의 일정하지 않았다. 

 

역시, 이 때도 학과에 대해서 각별히 잘했다고 할만한 것은 없었다. 그 중에도 수학, 영어라고 하면 가장 힘든 쪽인데, 라고 하며 공부도 하지 않고 매일매일 자유로운 방침으로 놀며 지내고 있었다. 따라서 학교 서적은 점점 나쁘게 될 뿐으로, 예과 입학 당시는, 지금의 하가 야아치(芳賀矢一******) 씨 등과 같은 자리에서, 상당히 같이 있었지만, 내쪽은 공부를 안했기 때문에, 아래로 아래로 내려 갈 뿐이었다. 그 외, 당시의 동급생에는 지금 미술학교장을 하고 있는 마사키 나오히코(正木直彦), 전문학무국장을 하고 있는 후쿠하라 요지로(福原鐐二郎), 외국어학교의 미즈노 시게타로(水野繁太郎) 씨등이 있어서, 그 사람들은 아주 잘하는 축이었지만, 우리들 놀기 좋아하는 무리는 모두 성적이 좋지 않아서, 점점 이들과 자리가 멀어질 뿐이었다.

 

공부를 하지 않았으니까, 어느쪽이냐고 하면 운동은 비교적 좋아하는 쪽이었지만, 그 운동도 몸이 허약했기 때문에, 규정대로 운동을 노력해서 했던 것은 아니다. 단지 놀았다는 쪽에 불과하지만, 보트 레이스 정도는 좋아해서 했던 족이다. 앞에서 말한 나카무라 제코씨등은, 아주 운동을 잘하는 쪽이라서, 언제라도 보트에서는 챔피언이 되어있었지만, 나는 좋아서 했지만, 챔피언 따위에는 어찌해도 되지 못했다.

 

그 외의 운동이라고 해도, 당시는 아직 야구도 없고, 테니스도 없었으니까, 보통 체조정도라서, 병식 체조는 하지 않았다. 요컨데 운동이라기보단 제멋대로 놀고 지냈다는 쪽으로, 종종 봄방학등이 되면, 책상을 싸그리 치워버리고, 놀음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험기간이 되어서도 그런 걱정은 하지 않는다. "내 어찌 시험 점수 따위에 연연하랴"라는 생각으로, 전혀 공부란 공부는 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두뇌는 발달하지 않고, 성적은 점점 나빠질 뿐이었다. 도대체 나는 머리 나쁜 쪽에서-지금도 그러하지만-거기다가 공부를 하지 않는 쪽이었으니까, 학교에서의 신용도 점차 잃게 되어, 마침내 예과 2년 때에 낙제라는 운명에 처하기에 이르렀다.

 

낙제하고 보니 누구나 같이, 과연 좋은 기분은 들지 않는다. 그 후는 전과 다르게, 진지하게 공부도 하게 되었지만, 역시 사람이 보통의 일을 했던 것뿐으로, 특별히 엄격한 공부를 계속했던 것은 아니다.

교실에 들어가서도 전과 다르게, 단지 비상히 주의해서 교사가 말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고 할 정도의 것이었다. 진지하게 공부하고, 학교에 가서도 진지하게 교사가 말하는 것을 주의해서 듣기라도 하면, 그런 무턱대고 고생하지 않아도, 보통이라면  할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나는 설령 진지한 공부를 하게 된 뒤라도, 시험 한참 전부터 결코 고생 같은 것은 하지 않고, 시험 그 전날 밤이 되어서, 처음으로 공부해두자라는 방법을 취하고 있던 정도이다.딱 예과 3년, 19세 즈음의 일인데, 우리 집은 원래부터 풍족한 편은 아니어서, 한번 집에서 학자금을 받지 말고 해보자라는 생각에서, 월 5엔의 급여로 나카무라 제코씨와 같이 사숙 교사를 하면서 예과 쪽에 다녔던 적이 있다.

 

이게 나의 첫 교사 경험으로, 그 사숙은 에토의숙(江東義塾)이라고 하고 혼죠(本所)에 있었다. 어느 유지들이 협동하여 세운 것인데, 교사는 역시 지금 생각해봐도 아주 불결한 부류였다.

 

1개월 5엔이라고 하면 아주 적은 금액이지만, 그때는 그것으로 부족없이 살았다. 학원 기숙사에 들어가 있었으니까, 기숙사비 즉 식비로는 월2엔으로 끝내고, 예비문의 수업료라면 월 겨우 25전(더욱이 1학기 분 전납하게는 되어있었는데) 거기에 서물(書物)은 대체로 학교에서 빌렸으니까, 각별히 그 쪽에는 돈도 들지 않았다. 우선 이 중에서 목욕비를 조금 빼면, 잔돈은 대체로 용돈이 되어서, 5엔의 돈을 받으면, 바로 그 잔돈만을 나카무라 제코씨의 몫과 합쳐 둬서, 같이 나갈 때는 많이 먹는 쪽에서 써버렸던 것이다.

 

시간도, 에토 의숙 쪽은 오후 2시간만 일했으니까, 예비문에서 돌아와서 가르치게 되었다. 그러니까, 밤 따위는 물론 차분히, 자유롭게 자신의 공부를 하는 것도 가능해서,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고, 약 1년씩이나 이렇게 하고 있었는데, 이 토지는 비상히 습기가 많았기 때문에, 마침내 급성 트라코마(trachoma, 독일어-trachom-원문에는 독일어인 트라홈이라고 적혀 있다)를 앓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내 눈은 좋지 않다. 부모님은 그 트라코마를 엄청 걱정해서 "어쨌든, 그런 곳이라면 무리해서 근무하고 있을 필요도 없겠지.'라고 해서, 학원 쪽은 그만두고, 예비문에는 집에서 다니기로 했는데, 얼마 안가 그 에토 의숙은 없어져 버렸던 것이다.

 

그 후, 나중의 학비는 말할것도 없이, 다시 집에서 받았지만, 대학교에 진학하게 되고나서는, 특히 문부성에서 자금을 받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또 도쿄 전문학교의 강사를 맡아서, 그정도로, 고생도 않고 대학교를 마친 사정으로, 요컨데 어떤 도움을 주는 것도 없어, 나는 학생시절을 회고하며, 오히려 독자 여러분 때문에 교훈이 되지 말 것을 바라는 것이다.

 

*주(인물)

*.소가 스케노리(曾我祐準, 1844년~1935년)-일본의 군인이자, 정치가.

**.구마모토 아리타카(本有尚, 1860년~1943년)-일본의 교육자이자 정치가.

***.우에무라 슌페이(植村俊平, 1863년~1941년)-일본의 정치가, 오사카 시장을 지냈음.

****.니토베 이나조(新渡戸稲造, 1863년~1933년)-일본의 농학자, 교육자. 국제연맹사무차장. "무사도"라는 저작이 유명하다.

*****.나카무라 요시코토, 혹은 제코(中村是公, 1867년~1927년)일본의 관료, 실업가, 정치가. 나중에 남만주철도회사(만철)의 이사로 있을 때, 만주로 소세키를 초대했는데, 소세키는 이 만주 여행의 경험을 "만한 여기저기(満韓ところどころ)"라는 제목의 글로 발표했다.

******.하가 야이치(芳賀矢一,1867년~1927년)-일본의 국문학자.

 

 

 

*주(단체)

1.세이리츠 학사(成立学舎)-메이지 시대 초기에서 중기에 도쿄에 있던 교육기관.

2.니쇼학사(二松学舎)-1877년에 미시마 츄슈(三島中洲)가 세운 한학숙(漢學塾). 지금의 니쇼학사대학

3.삿포로 농학교(札幌農学校)-메이지 초기에 홋카이도에 세웠던 농업학교. 지금의 홋카이도 대학(北海道大学).

4.대학 예비문-지금의 대학교 1,2학년 과정?

5.남만주철도주식회사(南道株式社)-태평양 전쟁 이전까지 만주지역에 있었던 철도 사업을 중심으로 한 기업. 패전 이후 해체됨.

by 재팔 | 2009/08/29 17:50 | 트랙백 | 덧글(0)

모리 오가이의 자식들

                                                                             [또 나인가?]

나츠메 소세키와 함께 일본 근대문학의 top에 위치한 모리 오가이는 여러가지 특이한 삶을 살았습니다.
예를 들면 산책을 나갔을 때마다 군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버릇도 있었고(물론 그렇게 하고 다니다가 애들한테 군의관이라고 캐무시 당한 적도 있었지만 말입니다),  심각한 결벽증의 소유자로서 어떠한 먹을 것이라도 가열하지 않으면 절대 먹지 않는 버릇도 또한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괴인(?) 모리 오가이는 자식들의 이름도 괴이하게 지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인 모리 오가이의 장남과 장녀의 이름을 한번 보시자면,

 장남-於菟(おっと, 옷토)
 장녀-茉莉(まり, 마리)

뭔가 심상치 않은 걸 느끼셨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이들의 이름은 모두 서양식 이름이지요.-_-;; 각각 서양인(독일)의 이름인 otto나 marie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 두 명 이외에도 모리 오가이는 아들과 딸 각각 한명을 더 데리고 있었습니다. 그럼 남은 이들의 이름은 과연 무엇일까요?

 차남-類(るい, 루이)
 차녀-杏奴(あんぬ, 안누 혹은 안느-독일어 위키에서는 Annu와 Anne, 두 개를 다 쓰고 있습니다-)

이들도 모두 서양식 이름입니다.
어쩄든 이들 자식들의 이름을 보면 대략 모리 오가이의 서양 호감도를 옅볼 수가 있습니다.
본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내고, 저 자녀들의 후일담을 찾아보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오토-도쿄 의대 졸업, 의대교수.
마리-두 번 이혼. 오가이가 너무 애지중지해서 키운 딸이라 살림능력도 형편 없어서 사는데 고생이 많았음. 나중에 소설가가 됨.    
       여러 연애경력을 가짐.
안누-수필가
루이-수필가

오토를 제외하면 모두가 문학에 몸을 담아 살아갔습니다. 역시 오가이와 자식들의 천직은 문학이었나봅니다.

ps:이런 재밌는 소재를 잘 꾸미지 못하니, 이야기꾼으로서 자질 실격이라는 것을 통감합니다-_-;;.

by 재팔 | 2009/08/08 18:49 | 트랙백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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