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 17일
우에하라 유사쿠
인물
1879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동기에 아키야마 요시후루-秋山好古- 등이 있음). 주로 프랑스 육군을 모범으로 일본 육군 공병의 근대화에 공헌하여, "일본 공병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러일전쟁 때는, 장인 노즈 미치쓰라(제4군 사령관)과 같이 제4군 참모장으로서 참가한다.
이후는 군정밭에서 중직을 역임하여 활약한다. 1912년, 육상 이시모토 신로쿠(石本新六)가 재임 중에 사망했기 때문에 후임 육상에 취임했다.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육군이 제안했던 2개 사단 증설안을,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 공작이 재정을 긴축하기 위해 거부했기 때문에, 유악상주권을 행사하여 대신을 사임했다. 이후, 육군은, 우에하라의 후임자를 내놓지 않아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를 이용하여 사이온지 내각을 총사직시키는(2개 사단증설문제)등, 육군의 존재 향상에 부심한다.
참모총장으로서 수행하고 있었던 시베리아 출병 때에는, 국제협정에 의해서 1920년 4월에 철수하기로 되었지만, 우에하라는 이것을 "통수권 간섭"으로서 거절, 하라 내각이 육군대신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의 동의를 얻고 철수를 각의에서 결정하자, 현지 정부와의 철수 협정이 체결되기 전날 밤인 4월 4일 밤에 러시아 측에게 총공격을 가하여 블라디보스토크를 점령해 버렸다. 이리하여 일본만이 단독으로 시베리아에 주둔하게 되어 국제적 비난을 받게 되었을 뿐만이 아닌, 니항사건등의 비극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수상 하라 다카시(原敬)는 같은해 4월 27일의 일기에 이 사건을, "참모본부의 음모"라고 단정하여 우에하라를 비난하고 있으며, 격노한 다나카가 우에하라를 경질하려고 하자, 우에하라는 원로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県有朋)에게 애원하여 경질을 취소시켰다.
육군부 내에서 규슈 출신자를 중심으로 하는 "우에하라벌"을 형성하여 조슈벌과 대항하여, 참모총장의 제1선을 물러난 뒤도 종신 현역 원수로서 육군에 영향을 계속 갖고, 특히 다나카 기이치와 격렬하게 대립했다. 그리고 다나카의 후계자가 되었던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의 육군 근대화 사상(우가키 군축宇垣軍縮)에 이해를 보이지 않고, 그 반대를 지원, 나중에 황도파(皇道派)의 온상을 만들고, 육군에 있어서 파벌항쟁, 확집의 원인이 되었다는 증언(다나카 류키치田中隆吉)도 있다.
그의 부관을 맡았었던 이마무라 히토시(今村均)에 의하면, 군사서를 중심으로 엄청난 독서광이었던 듯하다. 프랑스어 원서를 읽었을 뿐 아니라, 군사 뿐이 아닌 폭넓은 분야에 이해가 있었다고 한다. 잔소리가 심하여, 주위로부터 소외된 적도 있었는데*, 그러나 그것은 사물에의 광대한 지식으로부터 나온 것이며, 감복할만한 것*이었다고 이마무라는 쓰고 있다. 이마무라의 글에서, 우에하라의 부관시절이 상세히 얘기되고 있다.
그 외
*-의역
# by | 2008/10/17 10:14 | 트랙백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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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무라 히토시의 회고록에는 영국군 보병중대 가지고 딴지 거는 얘기도 있던데 재밌습니다.ㅋㅋ 이러니 우에하라가 다른 사람들에게 왕따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ㅋㅋ
제가 일하던 현장이 거기에 있었지요.
참 그곳은 좋았습니다.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