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다 로한


코다 로한(幸田 露伴, こうだ ろはん, 1867년 8월 22일 ~ 1947년 7월 30일)은, 일본의 소설가이다. 본명은 시게유키(成行)였다. 별호로는 카규안(蝸牛庵), 사세노츠유(笹のつゆ), 설음동주(雪音洞主), 탈천자(脱天子) 등 다수가있다. 에도 시타야(江戸下谷) 출신이다. 딸인 후미(文)도 수필가이자 소설가였다. 제국 학사원(帝国学士院)과 제국 예술원(帝国芸術院)의 회원이었다. 제1회 문화훈장(文化勲章)를 받았다.
『風流仏』로 평가받고, 『오층탑(五重塔)』『운명(運命)』등의 작품으로 문단에서의 지위를 확립했다. 오자키 코요(尾崎紅葉)과 함꼐 코로지다이(紅露時代)라고 불리는 시대를 쌓았다. 의고전주의(擬古典主義)의 대표적인 작가로, 또한 한문학과 일본 문학이나 각 종교에도 능통하여, 많은 수필이나 사전(史伝)외, 『바쇼 칠부 평석(芭蕉七部評釋)』등의 고전연구 등을 남겼다.

생애

1867년 7월 23일, 에도 시타야 三枚橋横町(현재의 도쿄도 타이토구 東京都台東区)에 넷째 아들로서 태어난다. 아버지는 바쿠후의 신하(幕臣) 코다 토시미츠(幸田利三,시게노부?成延)로, 어머니는 유우(猷). 코다 가문은 에도 시대, 다이묘의 取次(1)를 맡았다. 어릴적 이름은 테츠시로(鉄四郎)엿다. 원래 병약하였고, 생후 27일째에 의사의 신세를 지는 등, 어릴적은 몇번이나 생사의 고비를 헤맨 적이 있었다. 다음해, 우에노 전쟁(上野戦争)가 일어났기 떄문에, 아사쿠사 스와쵸(浅草諏訪町)로 이사를 간다.

시타야로 돌아온 후, 칸다(神田)에 정착했다. 시타야 센바시토오리의 세키 치요(関千代 서가 세키 셋코関雪江의 누나)의 학사(원문에는 塾)에서 배웠고, 御徒士町의 아이다씨(相田氏)의 학사에서 素読을 배웠다. 1875년, 치요의 권유로 도쿄 사범학교 부속 소학교(나중에 도쿄 교육대학 부속 소학교, 지금의 치쿠바대학 부속 소학교)에 입학했다. 이때부터 草双草, 독본을 애독하게 되었다.

졸업 후인 1878년, 도쿄부 제1중학 정칙과에 입학한다. 오자키 코요(尾崎紅葉)나 우에다 카즈토시(上田萬年), 카노 코키치(狩野亨吉)들과 동급생이었다. 나중에 집안 사정으로 중퇴했고, 14세가 되었을 때, 도쿄 영학교(현재의 아오야마 가쿠인대학)에 진학하지만, 이곳도 중도 퇴학했다. 도쿄부 도서관에 다니게 되어, 아와시마 칸게츠를 알았다. 또한 형 시게츠네의 영향으로 하이카이에 능숙해졌고, 또 菊地松軒의 영의숙에서는 한학, 한시를 배웠다.

16세 떄, 급비생으로서 체신성 전신 수기학교에 들어갔고 졸업 후에는 관직인 전신 기사로서 홋카이도 요이치(余市)에 부임했다. 츠보우치 쇼오(坪内逍遥)의 『소설 신수(小説神髄)』나 『당세 서생 기질(当世書生気質)』과 만나게 된 로한은, 문학의 길을 지향할 정열이 싹텄다고 한다. 그러나 1887년 자리를 버리고 귀경(歸京)했다. 이 홋카이도에서 도쿄까지 가는 여정이 "突貫紀行"의 제재(題材)이다.
면관 처분을 받았기 때문에 아버지가 시작한 지물포 '愛々堂'에서 일했고, 한편으로 이하라 사이가쿠(井原西鶴)의 책을 즐겨 읽었다. 1889년, 홋카이도의 부임지에서 돌아온 로한은 '露団々'을 기초해, 칸게츠를 통하여 '도읍의 꽃(都の花)'에 발표했다. 이것이 야마다 비묘의 격찬을 받고, 더 나아가 '風流佛(1889년)', 야나카 텐노지(谷中天王寺)를 배경으로 한 '오층탑(1893년)'등을 발표하여,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한다.
1894년, 장티푸스에 걸려 죽을 뻔 했으나, 다음 해에 결혼, 그 이후 수년 동안 '수염 기른 남자(ひげ男, 1896년)', '新羽衣物語(1897년)', '椀久物語(1899~1900년)'을 발표, 또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도시론(都市論)인 '한 나라의 수도(一国の首都, 1899년), '물의 도쿄(水の東京, 1902년)도 발표한다.

이 즈음에 동 세대의 오자키 코요와 함께 '코로 시대'라고 불리는 황금시대를 맞이한다. '사실주의의 오자키 코요, 이상주의의 코다 로한'으로 나란히 불리워 메이지 문학의 한 시대를 만든 로한은, 근대 문학의 발전을 방향지었다. 또 오자키 코요, 츠보우치 쇼요, 모리 오가이(森鴎外)와 함께, '코로쇼오 시대(紅露逍鴎時代)'라고 불린 적도 있다.
1904년, 그때까지 몇번이나 중간에 그만뒀었던 '天うつ浪'의 집필을 완전히 중단했다(추후에 다시 번역). 이 이후, 주로 사전 집필이나 고전 평역에 주안을 두었다. 사전 작품으로서는 '요리토모(頼朝)_', '타이라노 마사카도(平将門)', '카모 우지사토(蒲生氏郷)'등이 있다. 한편, 이하라 사이가쿠나 '난소사토미 핫켄덴'을 평역했고, 沼波瓊音, 太田水穂들 바쇼 연구회의 6명과 같이 쓴 '바쇼 하이쿠 연구(芭蕉俳句研究)'를 출간했다. 1920년에는 '마츠오 바쇼 칠부작(松尾芭蕉七部作)'의 주석을 시작해, 17년이나 걸려서 만년인 1947년에 평역을 완성시켰다.

1907년, 당의 전기소설(伝奇小説) 유선굴(遊仙窟)이 만요슈(万葉集)에 깊은 영향을 준 것을 논한 '유선굴'을 발표했다. 1908년에는 교토 제국대학 문과대학 초대 학장인 옛 친구 카노 코키치에게 권유받아서, 국문학 강좌를 맡은 강사가 되었다. 같은 시기에 나이토 코난(內藤湖南)도 동양사 강좌를 맡은 강사로 초빙받았다. 두 명은 각자 소설가로서, 저널리스트로서 당시부터 유명했지만 학자로서의 역량은 미지수였으며, 카노의 초빙은 파천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로한의 지도를 받은 青木正児의 이야기에 의하면, 일본 문파론(日本文脈論, 일본 문체의 발달사)와 소가 모노가타리(曽我物語)와 일본식 범찬에 대한 문학론과 치카마츠 몬자에몬등의 강의 내용으로, 결코 좋은 말솜씨는 아니었지만 학생들의 평가는 엄청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칠판에 쓴 글씨는 초서체로 갈겨 썼고, 게다가 체격이 다부지고 머리가 커서 그 글을 덮어버려서 학생들은 노트 필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로한은 학자로서도 충분한 소양이 있었지만, 어떤 사정에 의해 하계휴가로 도쿄로 돌아온 채로, 겨우 1년도 되지 않아(교토로 이사했던 것은 당해년 초였다)로 대학을 그만둬 버렸다. 로한 자신은 농담처럼 교토는 산만 있어서 낚시를 할 수 없으니까,라고 말했지만, 관료적이고 갑갑한 대학교에 적응할 수 없었던 듯하다. 또한, 부인 키미코(幾美子)가 병이 든 것도 이유로 생각된다(키미코는 다음해 1910년에 사망했다). 얄궂게도 대학을 그만둔 다음 해인 1911년에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받는다.

잠시 작품을 발표하지 않은 시기 후, '유정기(幽情記, 1915년~17년의 작품을 정리한 단편집), '운명(運命, 1913년)을 발표하여 대 호평을 얻고 문단에 부활한다. 이 작품들은 중국 고전을 답습한 작품이며, 이 이후에도 중국에서 소재를 얻은 작품을 많이 발표하였다.

1936년 4월 28일에는 제1회 문화훈장을 수여받고 제국 예술원 회원이 된다. 1947년 7월 30일, 전후에 이사가서 살고 있던 치바현 이치카와시(千葉県市川市)에서 81세로 사망했다. 묘는 이케노우에 혼몬지. 계명은 露伴居士이다.

by 재팔 | 2009/10/10 07:33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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